최동원의 영구결번으로 본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영구결번' 사례
기타 2011/09/16 14:18 입력 | 2011/09/16 14:4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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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고향팀, 롯데에서 감독을 해보고 싶다”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향년 53세의 나이로 고인이 된 최동원 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이 고향팀 롯데 자이언츠 시절 달고 뛰었던 배번 ‘11번’이 영구결번이 될 예정이다.



지난 15일(목) 롯데 자이언츠 구단대표 장병수 사장은 故 최동원 감독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을 조문한 뒤 최동원의 등번호 11번 영구결번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故 최동원 감독의 영구결번이 확정되면 최동원 감독은 롯데 구단 사상 첫 영구결번의 주인공이 된다.



롯데 자이언츠는 오는 30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리는 경기에서 故 최동원 감독의 영구결번 소식을 전하고 고인의 현역 시절 활약상을 영상으로 제작해 상영하는 등 ‘최동원의 날’로 정하고 추모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한편, 한국프로야구의 최초의 영구결번 사례는 두산 베어스의 전신 OB 베어스의 故 김영신 선수의 ‘54번’이다.



김영신은 상문고와 동국대를 거치면서 고교 때부터 유망주로 각광을 받던 포수였다. 특히 1979년 제 34회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 8강전 상문고와 대구상고의 경기에서 결승 2루타를 치며 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이 경기는 이틀 동안 연장 23회에 걸쳐 진행된 경기에서 4번 타자로 맹활약한 김영신은 상대투수의 초구를 받아쳐 3루쪽으로 빠지는 적시 2루타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김영신은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국가대표 포수를 도맡아했고, LA 올림픽 야구대표팀에서 유일하게 포수로 뽑혀 활약했다.



특히 1루 송구 시에 백업플레이를 최초로 시도하며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겸한 보기드문 선수였다.



당시 성대 장채근, 연세대 장호익, 고려대 서효인 등 보다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은 김영신은 85년 OB 베어스에 2번째로 지명된다. 당시 OB는 김경문, 조범현이라는 걸출한 포수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두 선수가 타격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여 김영신을 지명했다.



당시에는 프로 입단 후 활약이 없으면 지명 실패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신인 선수들에게 강박관념이 있었다. 김영신은 강박관념을 이기지 못하고 통산 프로 성적 22경기 출전에 타율 1할5푼6리를 기록했다.



국가대표 주전 포수 출신인 김영신은 프로에 와서 큰 벽에 부딪치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김영신은 1986년 8월 15일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한강하류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판명 내렸다. 당시 OB 베어스는 잠수부까지 동원하여 김영신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유족들은 사고 후 당시 구단과 감독에게 선수기용 방식 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강력하게 항의하고 보상을 요구 했고, 프로야구 최초의 현역선수 죽음이라는 점에 큰 멍에를 짊어지게 된 OB 베어스측은 김영신의 배번 ‘54번’을 영구결번 처리하고 영결식까지 치러졌다.



당시 2군이 퇴물 선수 집합소라는 그릇된 사회적 인식이 김영신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김영신의 배번 ‘54번’은 한국프로야구사의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김성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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