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이너 열전]①고아원에 버려졌던 샤넬, 세계 최고된 비결은?
IT/과학 2019/09/17 07:0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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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로고 ©로이터=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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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편집자주]"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1883년 8월~1971년 1월)이 생전 남긴 말입니다. 흔히 패션은 유행에 민감하다고 하지요. 그러나 유행을 좇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디자이너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대의 편견과 맞서며 기성 패션계에 도전했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계 패션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디자이너들의 극적인 삶을 매주 한편씩 소개합니다.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이하 샤넬)은 지난 15년간 패션계를 떠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점점 잊히고 있었다. 그를 기억하는 이조차 '한물간 디자이너'쯤으로 여겼다. 주름이 깊게 팬 샤넬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택 소파에서 패션 잡지를 보다가 소리쳤다.

"질질 끌리는 스커트(당시 유행 디자인)는 마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제작된 제품 같다. 이런 옷들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패션업계 종사자라면 이후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대부분 알고 있다. 샤넬은 거짓말처럼 복귀했다. 지난 1954년 2월 그의 나이 71세 때였다. '탈코르셋' 디자인으로 "거추장스러운 패션 스타일에서 여성을 해방시켰다"는 그가 15년 만에 다시 등장하자 파리 패션계는 술렁였다. 샤넬은 기득권 패션계를 상대로 마지막 '도전'과 '도발'을 선언했다. 이 두 단어만큼 샤넬의 삶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

◇유년시절 고아원에 버려져…"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17일 패션업계에 따르면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나 성심회 수녀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흥에 빠져 지냈던 '장돌뱅이' 부친은 아내가 숨지자 12살의 샤넬을 고아원에 맡겼다.

함께 위탁된 언니·동생과 달리 샤넬은 수녀원의 엄격한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기숙 비용을 지불하는 '유료 원생'과 비교해 자신 같은 '무료 원생'을 차별하던 수녀들에게 반감을 품었다. 원생들은 수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샤넬은 입에 '어머니'를 올리지 않았다. 수녀들은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샤넬에게 간식을 못 먹게 하거나 성경 구절을 베껴 쓰는 벌을 내렸다.

샤넬은 고아원 생활에 대해 "모든 걸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그때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훗날 회상했다.

수녀원 생활이 그의 패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가 만든 명품 브랜드 '샤넬 디자인'에는 절제와 화려함이 공존하고 있다. 브랜드의 상징적인 장식인 새하얀 '동백꽃'이 대표적이다. 우아하고 세련되며 여성미가 도드라진다. 그러면서 '군더더기'는 최대한 절제했다.

엄격함이 요구됐던 수녀원에서 공상을 즐긴 샤넬이 어린 시절 경험을 디자인에 반영했다는 해석이 많다. 그는 수녀원 인근 수도원의 바닥 문양인 주교관·지팡이·별·달·해 등을 보면서도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 '코코샤넬'를 쓴 앙리 지델은 "수도원 바닥 조약돌에 새겨진 문양을 관찰하며 샤넬은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며 "물론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 했겠지만, 당시 생활은 미래의 성격과 심미안에 이르기까지 샤넬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명품은 입기 편해야 한다"…귀족사회에 '반기'

샤넬은 고아원을 거쳐 직업학교에서 생활한 뒤 지난 1902년 의상실에 취업했다. 19세 나이로 귀부인에게 상품을 판매하고 기성복을 수선했다. 밤에는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요즘 말로 '투잡'을 했다.

술집 손님들은 샤넬에게 '코코(CoCo)'라는 애칭을 붙였다. 샤넬은 코코의 영문자 'C' 2개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붙여 훗날 브랜드 로고로 사용한다. 우리가 아는 '명품' 샤넬 로고는 동네 술집에서 탄생한 셈이다.

지난 1909년에는 여성용 모자 가게를 파리에 연다. 그의 연인이 후원자로 나섰고 이 극적인 '러브 스토리'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당시 문을 연 파리 매장은 '제국'이라 불리며 지난해 111억달러(약 13조원) 규모의 매출을 올리는 브랜드 샤넬의 모태가 된 곳이다. 샤넬은 모자에 이어 의류에도 도전해 본격적으로 명품 사업을 시작한다.

예술 작품 같은 화려한 의상이 당시 파리 패션계 대세였다. 값비싼 모직 천으로 제작됐고 강렬한 색감·무늬·주름·장신구가 눈에 띄었다. 샤넬은 모두 불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럭셔리(명품)는 입기 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명품이 아니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샤넬은 남성 속옷 소재인 '저지천'으로 만든 단색 드레스를 내놨다. 저지천은 신축성이 뛰어나 착용감은 물론 활동성도 좋다.

치마 길이는 무릎 근처까지 올렸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코르셋 장식이 달린 채 바닥에 질질 끌릴 것만 같은 길이의 치마'로 멋을 내던 귀족사회 패션에 반기를 든 셈이다. 파리 패션계 기득권자들은 "부자들에게는 불필요한 옷"이라며 샤넬 제품을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타깃층' 여성들은 열광했다. 학자·사업가·운동선수 등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지갑을 열었다. 당시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진출이 활발했던 여성들이 입기 딱 좋았다.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제품이었고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패션이었다. 샤넬은 패션업계 최초로 여성용 바지도 만들었다. 여성용 승마 바지도 최초로 선보였다. 그전까지는 여성은 '승마용 스커트'를 입어야만 했다.

◇'페미니즘의 우상'…"지금 당신이 입은 옷은 가짜 샤넬이다"

여성주의 운동을 일러 흔히 '탈코르셋 운동'이라고 한다. 샤넬이야말로 '탈코르셋'의 필요성을 세상에 알린 선구자였다. 실제로 여성계는 '페미니즘의 우상(icon)'으로 그를 꼽는다. 이들은 실용성보다 '장식' '보여주기'에 치중하는 21세기 샤넬 브랜드 제품을 두고 "지금 당신이 입은 옷은 가짜 샤넬이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샤넬은 '여성성'을 파고들어 탐구한 디자이너였다. 남성의 도움에 의존하는 여성을 비난했다. 무엇보다 그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꾸밀 줄 아는 여성'이었다. 꾸밀 줄 알아야 내면도 가꿀 줄 안다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여성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닌 자신의 가치에 걸맞은 나이를 갖는다"며 가치를 추구하라고 촉구했다.

샤넬은 자신의 디자인만큼이나 극적인 삶을 살았다. '정부'(情婦)로 살던 시절 영국 사업가 아서 에드워드 카펠을 만나 열렬히 사랑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금기어로 취급하는 움직임이 유럽 사회에 여전히 존재한다.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노동자들과도 격렬하게 갈등했다. 노동자 파업으로 그는 15년간 패션계를 떠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점점 잊히고 있었다. 복귀를 결정했을 때 샤넬이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71세의 샤넬은 난간 2층에 서서 초초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자·평론가·업계 종사자 2000여 명이 그의 복귀 현장에 몰려들었다. 그 많은 인원이 왔는데도 박수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파리 일간지 콩파는 ‘1930년 촌구석에 살고 있는 코코 샤넬의 집에서'라는 표제를 달아 그의 복귀작이 유행에 한참 뒤처졌다고 조롱했다.

한평생을 확신에 차서 행동했던 샤넬이 의기소침해질 리 없다. 친구들에게 "두고 봐. 난 다시 시작할 것이다"고 호언 장담했다.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샤넬의 패션을 알아봤다. 미국인 바이어들이 앞다퉈 그의 출시 제품을 사들였다.

'코코 샤넬' 저자 앙리 지델은 "샤넬을 알아주는 나라는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었고, 이번엔 미국인들이 유럽을 움직여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다"고 적었다.

◇'패션은 변해도 스타일은 영원하다'…불멸의 이름으로 남은 샤넬

샤넬은 그다음 해 '샤넬 2.55백'을 선보인다. 짧은 손잡이만 달렸던 기존 여성 가방과 다른 디자인이었다. 이번에는 가방에 체인을 달아 여성들에게 '양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미국 라이프지는 성공적으로 복귀한 샤넬을 두고 "유행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왜 다시 일을 시작하느냐고요? 쉬는 게 지겹다는 것을 깨닫는 데 15년이 걸린 거죠. 이제는 허무에 빠져 있기보다 차라리 실패하는 편이 낫거든요."

샤넬은 복귀 이유를 묻는 한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는 지난 1971년 1월 영면에 들면서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그는 모처에서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패션은 변해도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그의 말대로 됐다. 샤넬은 불멸의 스타일로 남았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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