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지선] 도전하는 사회혁신가, 첫 3선 서울시장에 이르다
사회 2018/06/13 23:17 입력

100%x200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찍은 사진.

100%x200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던 당시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2011년 9월6일 故 이소선 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마친뒤 빈소를 나서고 있다.(뉴스1 DB)

서울대 제명 후 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 길 걸어
'출생에서 3선 고지까지' 박원순 당선인 스토리

(서울=뉴스1) 장우성 기자 = 13일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해 최초 3선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인의 60여년 삶은 혁신적인 도전의 연속이었다.

박 당선인는 1955년 경상남도 창녕군 장마면 장가리의 한 농가에서 2남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56년생인 손석희 JTBC 보도담당 사장과 동갑이라고 화제가 되기도 했으나 실제 나이로는 1살 많다.

서울대 제적·사법시험 합격 고향에서 중학교 졸업 후 경복고에 응시했으나 고배를 마시고 재수 끝에 이듬해 최고 명문 경기고에 합격했다. 1974년 서울대에 지원했지만 또 낙방하고 재수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천신만고 끝에 입학한 대학이었지만 첫 학기를 채 마치지 못한 1975년 5월22일, 이른바 '오둘둘 사건'으로 연행돼 재입학이 불가능한 제명 조치를 당하고 만다. 박 당선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오둘둘 사건'은 당시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에 항의해 벌어진 대규모 학생시위였다. 시위가 벌어진 날 저녁에 이화여대생들과 미팅 약속이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유명하다.

강제로 캠퍼스를 떠난 그는 병역을 마치고 1978년 법원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23세에 강원도 정선 등기소장에 부임했다. 이듬해는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면서 등기소장을 그만두고 사법시험 공부에 전념했다. 1980년 합격의 낭보를 듣고 들어간 사법연수원(12기)에서 평생의 멘토로 삼게 되는 고 조영래 변호사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다. 그들 역시 대학시절 유신 반대시위로 구속된 적이 있어 비슷한 처지의 동기생끼리 깊이 교류했다. 1982년에는 주변의 권유로 검사에 지원해 대구지검에 근무하게 됐지만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만다. 이유는 "남을 벌주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아서"였다.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 변호사 개업 뒤 조영래 변호사의 영향을 받아 점점 시국인권 변론을 맡게 된다. 망원동 수재사건(1984), 구로동맹파업 사건(1985), 미문화원 사건(1985), 김근태 고문 사건(1986), 부천서 성고문 사건(1986), 서노련 사건(1986), 보도지침 사건(1986), 한국민중사 사건(1987), 문익환목사 방북 사건(1989) 등 당시 굵직한 시국사건의 변론에 참여하며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1987년 6월항쟁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로 참여했으며 그해 가을에는 대우조선 파업 당시 제3자개입금지 혐의로 구속된 노무현 당시 변호사의 변론에 나섰다. 영화 '변호인'에도 등장하는 장면이다. '미투'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1993)도 맡아 최종 승소했다.

"넓은 세상을 보고 배우라." 가장 존경하는 선배였던 조영래 변호사의 유언에 따라 영국 유학길에 오른 1991~1992년은 그가 세계적 비정부기구(NGO)들을 돌아보며 시민운동에 눈을 뜬 계기였다. 귀국 직후 태동하기 시작한 참여연대 설립에 동참했다. 당시 멤버로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당선인, 김기식 전 의원 등이 있다. 1996년부터는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아예 사무처장으로 전념하면서 부패방지법 제정, 소액주주운동, 제16대 총선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했다.

아름다운재단·희망제작소 설립 선진국에서 활발한 기부문화에 눈 뜨면서 2000년 아름다운재단도 창립했다. 점점 일의 무게중심을 옮기면서 8년만에 참여연대를 떠났다. 이어 재단 소속이었던 아름다운가게를 2008년 독립시켰다. 영국의 '옥스팜'을 모델로 국내에 친환경 리사이클링 개념을 처음 도입한 실험이었다. 아름다운가게가 100여개 지점을 만들 정도로 성장하자 실사구시적 사회혁신정책을 생산하는 민간 씽크탱크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 공익활동가로 폭을 넓히던 그에게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아름다운재단에 급여를 기부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사이였다. 그러나 2008년 광우병 사태 후 '좌파단체 솎아내기'가 진행되면서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도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MB정부, 박원순 상대 명예훼손 소송 공동사업을 펼치던 공공기관과 기업들이 줄줄이 손을 떼는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 흔적이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박 당선인이 이 같은 정황을 언론인터뷰에 폭로하자 이명박정부는 2억원대의 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대한민국, 피고 박원순'으로 회자된 이 사건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소송이었다.

당시만 해도 주변의 수많은 공직 진출 권유를 거절해온 박 당선인이었지만 진지하게 정치참여를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김대중·노무현정부의 등장으로 되돌릴 수 없을 것으로 믿었던 사회민주화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판단이었다. 급기야 2011년 국정원의 '박원순제압문건'이 폭로되자 백두대간을 49일간 종주하면서 마음을 굳혀 같은 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 당선에 이른다.

이후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으로서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청년수당, 도시재생, 사회적경제기업 협동조합, 원전하나줄이기, 노동이사제, 토건에서 복지 패러다임으로 전환 등 수많은 사회혁신정책을 단행했다. 더 큰 꿈을 키워가던 그는 2017년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중도포기하는 시련도 겪었다. 그러나 이번에 서울시 최초 3선 시장 고지에 오르면서 여권의 차기 유력 대선후보로서 입지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박원순 당선인은 이날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뒤 캠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견해와 차이를 넘어 위대한 시민들의 위대한 도시를 만드는 데 함께 손을 잡겠다"며 "공정과 정의, 평화와 민주주의가 꽃 피는 대한민국을 서울에서부터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nevermind@news1.kr



저작권자 ⓒ 뉴스1 코리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핫이슈! 디오데오(www.diodeo.com)
Copyrightⓒ 디오데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